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탈리아 통일 (문단 편집) ==== 국제적 상황 ==== * '''[[대영제국|영국]]''' [[카밀로 카보우르]]는 북부 이탈리아를 통일하기 위해선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를 점령하고 있었던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만의 부족한 체급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동맹국이 필수적이었는데 그러한 동맹국으로는 [[대영제국|영국]]과 [[프랑스 제2제국|프랑스]]뿐이었다. 당시 [[러시아 제국|러시아]]나 [[프로이센 왕국|프로이센]]은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감수할 만한 명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영국의 수상이던 파머스턴은 개인적으로 이탈리아 통일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다만 영국이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하면서까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을 지원할 이유는 없었으며 더군다나 1856년 체결한 [[파리 조약]]에 의한 유럽의 외교질서에 만족하고 있었기에 그에 따라 프랑스의 강대화를 견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탈리아가 통일되어 프랑스의 영향력 안에 들어가는 건 영국에 있어서는 꽤나 큰 리스크였다. 따라서 영국은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없었고 이러한 태도는 파머스턴 내각을 이은 더비(E. S. Derby) 내각에서 두드러졌다. * '''[[프랑스 제2제국]]''' 영국이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 소극적이자 카보우르는 프랑스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 관심을 갖고 있던 [[나폴레옹 3세]][* 나폴레옹 3세는 젊은 시절 [[카르보나리]]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었다.]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내에서는 이탈리아 통일에 대해 미온적인 반응이 지배적이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폴레옹 3세가 이탈리아 통일에 관심을 가졌던들 공적으로 지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1858년 1월 14일 오르시니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이탈리아인]] 펠리체 오르시니(F. Orsini)가 나폴레옹 3세와 [[외제니 드 몽티조]] 황후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으로, 오르시니는 황제가 젊었던 시절 이탈리아 통일에 적극적이었던 것에 비해 황제로 즉위한 후 태도가 바뀐 것에 대해 분노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는 도리어 오르시니를 영웅시하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이탈리아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나폴레옹 3세는 코노(H. Conneau)를 보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카밀로 카보우르]]를 만나도록 하였고 이 자리에서 비밀회동을 가질 것을 합의하였다. 1858년 7월 20일 카보우르와 코노는 플롱비에르레뱅(Plombières-les-Bains)의 한 호텔에서 극비리에 회담을 가졌다. 이때 맺어진 합의를 '''플롱비에르 협약'''이라고 하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은 사르데냐-피에몬테가 도발하고 이 전쟁으로 인한 국제 관계와 전쟁의 국지화 노력은 주로 프랑스가 담당한다. >2. 전후 이탈리아를 다음과 같은 4개의 정치단위로 구성한다. > * [[사르데냐 왕국|사르데냐-피에몬테]], [[롬바르디아]], [[베네치아]], [[파르마]], [[모데나]] 등으로 구성되는 북부 이탈리아 왕국 > * [[토스카나]]를 중심으로 하는 중부 이탈리아 왕국 > * [[로마]]와 그 주변지역인 [[라치오]] 지방으로 축소된 [[교황령]]. > *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양시칠리아 왕국]]. >3. 이들 4개의 정치단위는 연방으로 구성되며 교황이 그 의장이 되나 실제로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지배한다. >4. 프랑스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영토인 [[사부아|사보이아]]를 합병한다.[* 사보이아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통치 가문인 [[사보이아 가문|사보이아 왕조]]의 본관이었으나 [[프랑스어]] 사용 지역이었다.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왕실의 본관까지 포기하면서까지 통일운동에 적극적이었다.] >5.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장녀인 15세의 클로틸데(Clotide) 공주는 나폴레옹 3세의 조카인 36세의 제롬(Jerome) 공과 결혼한다. *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 나폴레옹 3세가 두려워한 것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양국과 동시에 전쟁을 치르는 것이었다. 따라서 프랑스로서는 양국의 동맹 체결을 저지하거나 적어도 프로이센의 중립을 이끌어내야 했다. 당시 프로이센 국왕이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건강이 1857년 들어 극도로 악화되었고 11월에는 그의 동생 [[빌헬름 1세|빌헬름 왕자]]가 섭정하기 시작했다. 빌헬름은 영국과의 연대를 구상하고 있었고 오스트리아와는 친선을 도모하였다. 따라서 나폴레옹 3세는 러시아에 손을 내밀었다. 그는 러시아의 병력을 오스트리아 동부 국경에 집결시켜 프로이센의 발목을 잡는 한편 오스트리아의 모든 병력이 이탈리아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자 했다. 이리하여 1858년 9월, 제롬 공이 나폴레옹 3세의 특사 자격으로 당시 바르샤바에 와 있던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를 알현하게 되었다. 여기서 제롬 공은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지원할 경우 러시아가 프랑스 편에 서서 참전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국경에 7만의 군사만 주둔시키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제롬 공은 귀국 후에도 몇 차례 러시아에게 교섭을 제의하였으나 지지부진했다. 이후 제롬 공의 러시아 접촉을 알아챈 발레브스키 프랑스 외상은 제롬 공을 정치 일선에서 몰아내고 다시 러시아와 교섭을 재개하였고, 이듬해 3월 비밀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에서 프랑스는 [[흑해]] 비무장 조항의 철폐를 위해 노력하고 러시아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전쟁에서 프랑스에 우호적인 [[중립]]을 지키기로 합의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